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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 디디다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있는 나날> 켄턴 양과 스티븐스의 가슴 아린 장면

by didida 2024. 2. 3.

부커상, 노벨문학상의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남아있는 나날>
90년대 중반 비디오테잎을 빌려 영화를 봤다. 아주 잔잔하고 심심한 드라마라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친구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인생영화를 꼽으라면 항상 상위에 <남아있는 나날>이 있다. 안소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의 감정을 절제하는 연기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연기 대가들이나 할 수 있는 무엇이었고 스킨십 없고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지만 로맨틱 드라마가 지녀야 할 고상한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학생이었던 당시에는 "왜 스티븐스는 사랑(켄턴)을 바로 앞에 두고 보지 못하지? 자기 감정도 알지 못하네..."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세월이 흘러 영국의 문화도 좀 알게 되고 원작 소설도 읽어보고 무엇보다 극중 스티븐스의 나이가 되어보니... 스티븐스가 안쓰럽다. 자본의 주인의 일의 노예가 자긍심을 갖게 되면, 일 자체에 헌신 하는게 인생의 목표가 되면, 근면 성실의 덕목을 스스로 내면화 하게 되면 한줌의 자긍심을 지키려 찬란하게 펼쳐질지도 모르는 사랑(인생)을 눈 앞에 두고 눈을 감게 된다는 것을...  

원작 보다 나은 영화는 정말 드문데 <남아있는 나날>이 그렇다. 소설의 배경 인물 내용에 매우 충실하면서 스티븐스와 켄턴의 감정선을 연기하는 안소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은 정말 누가 마술을 부려 소설 속 인물에 영혼을 불어넣은 것 같다. 


"즐거운 저녁 되었으리라 믿어요, 켄턴 양."
그녀가 아무 대꾸도 없어서 둘이 같이 넓고 어두컴컴한 주방을 가로지는 동안 내가 또 한 번 말했다.
"즐거운 저녁 보냈겠지요, 켄턴 양?"
"네, 고맙습니다, 스티븐스 씨."
"그렇다니 다행이오."

뒤따라오던 켄턴 양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들려왔다.
"스티븐스 씨, 최소한 오늘 밤 제 지인과 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정도는 궁금하지 않으세요?"
"실례할 생각은 없지만, 켄턴 양, 나는 지체 없이 위층으로 다시 가 봐야 하오. 그야말로 세계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지금 이 순간 이 집에서 진행되고 있어요."
"안 그런 때가 있기는 한가요? 좋아요, 그렇게 급하시다면 요지만 말씀드리지요. 제 지인의 청혼을 수락했습니다."
"뭐라고 했소, 켄턴 양?"
"청혼을 받아들였다고요."
"아, 그래요, 켄턴 양? 그렇다면 축하할 일이군요."
"고맙습니다, 스티븐스 씨, 물론 사직서는 내겠습니다만 저희 두 사람의 입장에선 하루라도 빨리 저를 놓아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제 지인이 두 주 내로 서부 지방에서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거든요."
"최대한 빨리 새 사람을 구할 수 있게 힘써 보겠소, 켄턴 양. 그럼 이만 실례하고 위층으로 돌아가겠소."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으나 복도를 나가는 문간에 거의 다다랐을 때 "스티븐스 씨."라고 부르는 켄턴 양의 목소리가 들려와 또 한 번 돌아서야 했다. 그녀는 조금 전의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기 때문에 나를 부르기 위해 목소리를 약간 높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둡고 텅 빈 동굴 같은 주방안에 그녀의 목소리가 좀 기묘하게 울려 퍼졌다.

"제가 이 집에서 일해 온 지 여러 해가 되었건만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도 겨우 축하한다는 얘기밖에 못 하시나요?"
"켄턴 양, 나는 진심으로 축하했을 뿐이오. 거듭 말하지만 지금 위층에서 중차대한 일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속히 내자리로 돌아가 봐야 하오."
"스티븐스 씨, 당신이 제 지인과 저에게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그래요?"
"네, 스티븐스 씨, 저희는 종종 당신 이야기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죠. 예를 들면 당신은 음식에 후추를 뿌릴 때 항상 코를 감사 쥐는데, 제 지인이 툭하면 제게 그걸 흉내 내 보라고 하고는 배꼽을 잡고 웃지요."
"아, 네."
"또 하나 그이가 좋아하는 건 바로 당신의 '직원 격려사'랍니다. 솔직히 말해 제가 그걸 흉내 내는 데 꽤 전문가가 되었거든요. 몇 줄 읊기만 해도 우리 둘 다 깔깔 넘어간답니다."
"알겠어요, 켄턴 양. 자, 그럼 이만 실례하겠소."
(중략)......
"이런, 아직 올라가지 않고 있었소, 켄턴 양?"
내가 다가가면서 말했다.
"스티븐스 씨, 아까는 제가 너무 어리석었어요."
"미안하지만, 켄턴 양, 내가 지금은 얘기할 틈이 없군요."
"스티븐스 씨, 제가 좀 전에 한 얘기를 마음에 담아 두시면 안 됩니다. 제가 너무 어리석게 굴었어요."
"전혀 담아 둔 것 없소, 켄턴 양. 사실 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가지고 이러는지도 기억나지 않아요. 위층에서 아주 중대한 일이 진행되고 있어서 한담을 나눌 형편이 못 되오. 어서 올라가서 쉬라고 하고 싶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