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입구에 배달된 채 쌓여 있는 소포들을 풀어 듬성듬성 읽다 말고 예컨대 프로스트의 문체에 이끌려 이것저것 천천히 상기 할 수 있는 기분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고기토는 일찍이 없었던 냉정함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앞일로 자신의 죽음에 관하여 생각하고-15년, 20년씩이나 여전히 살아간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라 여겨-[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발견된 시간'으로 부터 '발견된 죽음'을, 뜨거워진 머리에 떠올리기조차 하리라.
"그렇지, 죽음은 시간이야!"
이리하여 잘 각성되어 있을 때라면 저항이 있으련만 그 단계에서는 설득력 있는 발견이라도 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자신의 죽음도 이미 얼마 전의 일인 것처럼 느껴지기조차 한다. 그리고 '얼마 전의 일'은 대단한 속도로 시간의 경과 건너편으로 멀어져 가는 법이다. 실제로 고로의 죽음이, 100년도 더 된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그리고 한참 전에 죽은 고로 곁에 자기 또한 죽어 오래된 자로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한들 부자연스럽지 않을 것 같다.
오에 겐자부로는 '발견된 죽음'을 소설 집필 중에 순간 떠올렸을까? 오랜 세월 가슴에 품고 있었을까? 이내 후자 쪽에 마음이 기울었다. 아마도 나쓰메 소세끼와 오에 겐자부로의 지리적 접점 '마쓰야마'(마쓰야마가 비교적 마음에 잘 그려지는 이유는 마쓰야마와 에히메현 일대를 돌아본 일이 있고 소설 '봇짱'의 지리적 배경을 답사했던 경험이 있다)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 뿐 아니라 일본 문단 전체가 존경해 마지않는 마르셀 프루스트를 오에라고 해서 이견을 가지고 있을리 없으니...
인생이 시간이고 사랑이 시간이니 죽음도 시간이다. 그리고 마르셀 프루스트가 시간을 발견하는 마법을 가져다 주고 시간이 흘러 1990년대에 들어 이와이 슌지는 영화 '러브레터'에서 죽은 사랑도 발견하는 마법을 보여준다. 그 이후에 집필 된 '체인지링' 에서 "그렇지, 죽음은 시간이야!" 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덧붙여 이와이 슌지가 영화에서 대놓고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소재로 등장시킨다. 흔히 인용하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시간을 발견하게 해주는 '홍차와 마들렌'이 영화에서는 후지이 이츠키가 고열로 병원에 갔을 때 간호사가 호명하는 "후지이 이츠키상~"이다. 후지이 이츠키는 간호사의 부름에 동명이인의 중학교 동창 지금은 비록 설산에서 죽었다고 여겨지는 그러나 후지이 이츠키에겐 아직 '발견되지 않는 사랑'이다. 후지이 이츠키(남)의 시체가 발견 되지 않은 설정은 친절한 영화적 언어라 하겠다.
소설 체인지링에서 고로가 죽자 고기토는 이편에서 건너편을 항해한다. 피터가 죽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순간 피터도 고로도 고기토 돌아오지 못할 건너편으로 간 것은 분명했다. 누구는 건너편으로 가고 우리는 건너편으로 간 누구들의 체인지링은 아닐까 체인지링을 체계적으로 하려고 학교에 다니는 거 아닐까 하는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벅차고 희망적인 느낌이 올라왔다. 러브레터의 마지막 장면에서 후지이 이츠키가 체인지링이 실현되는 학교 도서부의 후배들이 가져다 준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꼭 껴안고 느꼈을 그 감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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