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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 디디다

마루야마 겐지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중에서...

by didida 2023. 9. 20.

이 책은 시골에 칩거하며 소설과 정원일에 몰두하며 살고 있는 마루야마 겐지의 정원일기 혹은 정원사색 정도로 이해하면 될 수필집니다. 일전에 마루야마 겐지의 가벼운 수필집 <취미 있는 인생>을 읽은 터라 이 책도 그정도의 가벼움을 안고 있을거라 생각하고 별 기대없이 책장을 넘기는 데 곳곳에서 멈칫하게 만든다.

또 일전에 한병철의 <땅의 예찬>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책은 베를린에 살고 있는 철학자 한병철이 두 손으로 땅을 일구며(체험이 아닌 경험) 목도한 바를 정리 한 수필집이다. 황혼에 접어든 두 지식인이 매우 유사한 경험을 통해 매우 비슷한 어조로 당대의 예술인과 젊은이들에게 가짜 체험이 아닌 고통을 수반한 진짜 경험, 허울만 아름다운 가짜 예술 말고 진짜 아름다움을 피부로 느낄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단순히 한병철의 <땅의 예찬>과 마루야마 겐지의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두 권의 책 만으로 비교평가 하자면 한병철이 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마루야마 겐지가 더 철학적이고 깊이가 있다. 경험치의 차이가 있달까 '생의 통찰'이라는 부분에서 마루야마 겐지의 어조가 더 원숙하고 설득력이 있다. 그것에 비하면 한병철의 <땅의 예찬>은 작고 미묘한 정원의 움직임에서 다양한 미학적 심상을 이끌어내는... 마치 소설가 처럼 말이다. 아무튼 곳곳에서 두 지식인이 공통적으로 '고통을 수반한 경험'을 추구하라고 그것만이 아름다움이고 예술이고 인생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철 내내 꽃을 피울 순 없다

인생에서 겨울은 좌절의 기간이다. 식물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것도 새로운 비약을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개화, 개화의 연속인 식물이 존재하지 않듯, 성공, 성공의 연속인 인생 또한 없다. 좌절과 실패는 사람을 고독의 지옥에 던져 넣는다. 그 지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 중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지만, 맞서 싸워 자신에 의존하는 힘을 기른 사람은 재생 부활의 기회를 얻는다.(중략)

시골에서의 고독과 도시의 고독을 비교할 때, 도시에서의 고독은 어딘가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편견일까. 고독에서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없는 냉엄함을 시골에서 뼈저리게 느끼는 건 과연 나뿐일까. 어쨌든 소설가로서는 거의 이상에 가까운 환경에 몸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창작하는 자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기초 조건은 깊은 고독이기 때문이다.

정면충돌은 삶의 증거

내적인 고독만으로는 아무래도 유치함이 벗겨지지 않는다. 그런 작품이 보여 주는 것은 '태어나서 미안해' 식이다. 자립하지 못한 것을 경쟁이라도 하는 듯한 꼴사나운 비틀림에 지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어른의 감상에 대응할 수 있는 작품을 낳기 위해서는 외적인 고독, 이를테면 절대로 항거할 수 없는 엄동 같은 계절과 공간에 심신을 노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그네라는 편한 입장이 아니라 그 땅에 발을 디딘 주민처럼 말이다.

문학 팬이라는 사람들이 도대체 문학에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결코 존재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황홀한 꿈이나 연애, 그것의 그림 같은 해피엔딩이 원하는 것이라면, 그런 꽃들은 어차피 조화일 뿐 진정으로 감동을 주는 살아있는 꽃은 절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사(私)소설이라는 생생한 형식으로 쓰인 작품도 하우스에서 재배된 꽃 정도의 아름다움 밖에 띨 수 없을 것이다. 마음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떨게 하는 진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것은 여러 번의 겨울을, 어디까지나 자신의 힘에 기대어 헤쳐 나온 꽃에 한정될 것이다.

현실도피를 위한 아름다움, 나르시시즘을 건드려 주는 아름다움, 목숨을 가진 존재로서 당연히 해야 할 투쟁을 포기간, 이런 반자립적인 타락한 아름아움이 범람한다. 어느덧 이것을 예술이라고 착각하고 이런 것만 좋아하며, 이런 것을 본질을 감추는 위장 도구로 이용하는 이가 급격히 늘고 있다. 그러면서 본래 삶의 모습은 크게 왜곡되고, 그 덧없고 환영에 불과한 아름다움의 척도가 상식으로 고정돼, 역동적인 생명의 본래 모습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이런 풍조와는 전혀 관계없는 가혹한 현실은 여전히 만인의 주변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 어떤 허구를 들이대도 그 것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일시적인 속임수 따위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가벼운 것이 아니다. 달아나고 피해 보려 해도 외상값은 언젠가 반드시 갚아야 할 때가 온다. 그때에는 더는 싸울 마음을 한 방울도 짜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처지에 이른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파멸의 미 또는 유종의 미라고 해석하는 것은 자기 마음이지만, 객곽적으로 바라볼 때 인간적인 말로와는 아주 멀다. 수꽃(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 조차도 되지 못하고 썩은 봉오리보다도 못한 추악함 그 자체을 뿐이다. 

동식물에게 끊임없는 시련과 정면충돌은 필수 조건이며, 그것이야말로 삶의 증거일 수밖에 없다. 시련과 정면충돌을 빼고 진정한 행복감에 직결되는 생명의 빛은 절대 있을 수 없다. 하물며 인간임에야...

 

 

계절을 느낄 수 있게 월별로 각 챕터를 나누고 있다. 개인적으로 마루야마 겐지의 수작으로 꼽는 <물의 가족>에서 각 장에 들어가기에 앞서 짧은 한 문장으로 다가올 이야기를 암시하기도 하고 전 장과의 매듭을 짓기도 하고 또는 그 짧은 문장 자체로 장과 장을 구분하는 독립적인 영역을 확보하기도 했는데, 이 책에서도 매월에 들어가기에 앞서 매력적인 짧은 문장이 눈을 사로잡는다.

마지막으로 12월 <가장 아름다운 장미는 바람에 단련된 것이다>의 마지막 부분을 옮겨본다.

일년 내내 피는 장미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철 피는 장미라는 게 있지만 말장난일 뿐이다. 설령 품종이 개량돼 그런 장미가 나온다고 해도 거기서 받는 느낌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뻔한 영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봄에 단 한 번 피는 들장미가 주는 감동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정원이 겉모습의 화려함에 지배당해 내용은 죽은 정원이 되어 가고 있다. 정신의 죽음을 폭로하는 것이 목적인 듯한 정원과 문학이 횡행하는 현실에서 내가 목표로 해야 할 것은 그 정반대에 위치하는 것이리라. 내게는 큰 야심이 있다. 정원과 소설을 통해 도달 할 수 없는 세계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그 꿈을 실현하려면 음과 양을 상징하는 바람과 장미의 나날을 지날 수 밖에 없다. 바람은 장미를 단련시켜 진정한 아름다움을 부여하고, 장미는 바람에 향기를 실어 보낸다. 장미 향기처럼 관통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매력으로 감성과 지성을 격렬하게 불타오르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