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토지 기록을 남긴다.
13권에 다다르며 1919년 삼일운동도 지나고 역사적 역동성이 잔잔해진 탓인지 소설 속 이야기도 힘을 잃고 시간을 보내는 느낌이라 읽히는 진도가 더디다. 그러는 와중에 13권 첫 장을 열자마자 조선 新거지의 출현을 이해하게 되며 무릎을 탁 치는 구절이 있었다.
조선에는 웬 거지가 이리 많으냐, 그 실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총독부에 가서 물어볼 일이다. 가렴주구에 항거하는 민란도 수없이 있었지만 조선조 오백 년, 나라에서는 공전(公田)이라 하며 농민으로부터 땅을 거둬들인 일은 거의 없었고 설사 거뒤들였다 한들 결국 조선 백성이 경작하기 마련, 사유지의 경우도 땅문서라는 것이 애매모호했으나 땅문서 이상으로 윤리도덕이 견고하여 남의 땅을 도적질하는 일은 없었다. 항상 족하지 못했지만 마을마다 대개 객사라는 것이 있었고 여염집에서도 한두 끼의 끼니, 잠자리를 거절하는 풍속이 아니었기에 나그네는 있었으나 거지는 흔치 아니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삼천리 강산, 남의 땅으로 쫓겨간 사람이 부지기수인데 이 불운한 강산 거리거리에 거지들이 떼지어 방황하고 있는 것인가. 일인들 왈 조선에는 웬 거지가 이리 많으냐, 총독부에 가서 물어볼 일이다. 조선인은 게으르다, 어째 게으른가 그것ㅇ 역시 총독부, 동척에 가서 물어볼 일이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내쫓긴 수많은 사람들, 날품팔이 행상, 남의 집 고공살이, 그런 일자리나마 과연 충분하며 입에 풀칠할 만한 수입인가. 그러나 어쨌든 거지가 아닌 그런 부동인구가 우선은, 앞서말한 새로운업종의 구매자요 이용자인 것만은 사실이다. 자리를 얻기 위하여, 얻은 일자리를 부지하기 위하여, 장사를 하기위하여, 상투가 잘렸으니 이발소라는 곳에 가서 머리를 깎아야 하고 등물 할 내 집, 마을의 시내도 잃었으니 목욕탕에가서 몸도 씼어야 한다. 이발관에서는 머리에 바르는 지쿠(머리 기름) 냄새가 났다. 활동사진관 주변에서 올백한 건들이 사이다, 라무네 등을 마시며 오가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곤 하는데 그들에게서도 지쿠 냄새가 났고 손가락 사이에 면도날을 숨긴 새로운 직종, 일본서 기술을 배운 쓰리꾼, 그들도 지쿠 냄새를 풍겼고 이바타(요리사), 일인 상점의 점원 등, 쥐꼬리만 한 급료를 받는 부류의 청년들도 월급날에는 이발하고 목욕하고 지쿠 바르고 유곽을 찾는다.
늙은 할미는 손녀를 보고 물었다.
"머 묵노?"
"사탕."
"어디서 났노?"
"아부지가 한 푼 주데요."
"댓끼 놈의 가시나! 양식도 못 팔아묵는데 배우릴 끼라꼬 그거를 묵나! 회만 생기고 이빨은 안 썩을 기든가? 애비도 애비다. 죽물도 안 들어간 창자에 사탕이 웬 말고."
내일이 없는 아비 어미의 자포자기한 생활, 자포자기한 사랑 때문에 아이는 배도 안 부르고 이빨만 썩을 사탕을 먹게 된다. 떡 할 쌀, 엿을 골 엿기름 한 줌이 없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없는 것이 어디 그것뿐일까. 코딱지만 한 남의 곁방살이, 처마 밑이 부엌이며 아궁이에 지필 나무 한 가치 없고 간장 된장도 사 먹어야 하는 뜨내기 살림, 아이 입에 사탕만 물리던가? 돈 생기면 허기부터 달래려고 우동을 사 먹게 된다. 우동만 사 먹는가? 환장한 가장은 야바위판에 주질러 앉아 돈 털리고 호주머니 바닥 털어 술 사 먹고 돌아와서 계집자식 친다. 내일이 없는 뜨내기, 그들은 모두 허무주의자다. 허무주의는 소비를 촉진한다. 바닥을 털어가며 사는 사람들, 끝없는 노동력을 제공해도 바닥은 메워지지 않는다. 노동을 팔고 싶어도 팔 자리가 없어 빈털터리요 어쩌다 얻어걸리는 품팔이, 급한 김에 아이 입에 사탕 물리고 허기 달래려고 우동이며 국수며 혹은 떡이며, 해서 이들은 왕도 손님도 아닌 거지의 시늉을 내는 소비자인 것이다. 머지않아 거지로 전락할 사람들인 것이다.
조선의 신거지 출현에 대한 선생의 인식에 또 감탄한다. 위 마지막 구절에 '소비자'는 100년이 지난 오늘의 '소비자'와도 맥을 같이하고 있고 100년 전의 조선의 '왕도 손님도 아닌 거지의 시늉을 내는 소비자' 그들의 후예들은 그 '시늉'을 SNS에 뽐내며 서로의 거지 시늉을 부추기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더욱 감탄하며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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