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 한가> 이 짧은 기고문은 10여년 전 한병철의 칼럼이다. 그때 이 칼럼이 한국에도 큰 이슈였다. 당시 딴지일보 였는지 클리앙 이었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진짜 혁명이 불가능한지에 대한 여러 비판적 논평이 나왔다. 한병철의 주장이 매우 설득력 있었기에 그 만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누구는 한병철을 신자유주의의 흐름에 압도된 나약한 회색분자처럼 취급했고, 누구는 혁명의 조건이 소거 된 작금의 신자유주의 삶의 형태를 돌아보고 그 조건을 회생시킬 유의미한 계기가 되리라 여기기도 했다. 10년 전 여론은 한병철에 차가웠다. 너무 비관적이라 여겼다. 그간 한국에서는 촛불혁명이라 불리우는 대통령 갈아치우기는 있었지만 삶의 형태는 각자도생에 더욱 내몰렸고, AI로 인한 디지털 혁명은 이야기 하지만, 본질적인 혁명은 더욱 사문화되었다. 10년 전 여론이 아팠던 것일까? 신간 제목이 그때의 여론을 비웃는 듯하다.
다만 최근 한병철의 신간이 너무 재탕이라는 건 문제적이다. 10여년 전의 기고문을 제목으로 신간이 나온 것도 그렇고, 서사의 위기도 새로운 논조가 없는 재탕, 리추얼의 종말 이후 새로운 텍스트가 없다. 당대의 철학자 한병철을 좋아하지만 책팔이로 여겨지는 건 싫다.
자본주의와 죽음 충동 - 삶을 죽음으로부터 떼어놓기는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적인 요소인데, 이 떼어놓기가 설죽은 삶을, 산 죽음을 낳는다. 자본주의는 역설적인 죽음 충동을 산출한다. 자본주의는 삶을 죽인다. 치명적인 것은 죽음 없는 삶을 향한 자본주의의 노력이다. 성과 좀비나 피트니스 좀비, 보톡스 좀비는 설죽은 삶의 모습들이다. 설죽은 자는 어떤 생기도 없다. 오로지 죽음을 받아들여 품는 삶만이 진정으로 생기 있다. 건강 히스테리는 자본 자체의 생명정치적 모습이다.
데이터주의와 허무주의 - 데이터주의는 필시 허무주의와 짝을 이룬다. 데이터주의는 의미와 맥락을 포기하는 것에서 유래한다. 데이터가 의미의 공허를 채워야 한다고 데이터주의자는 믿는다. 온 세계가 파열하여 데이터가 되고, 우리는 더 크고 더 높은 맥락들을 점점 더 시야에서 놓친다. 이런 의미에서 데이터주의와 허무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다.
데이터주의와 허무주의의 텍스트는 2013년에 씌여진 챕터이다. 그러니 2024년 신간에 들어 간 이유가 궁금하다. 누구나 손쉽게 챗GPT를 활용하여 빅데이터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맥락을 뽑아내는 시대에 맞지 않는 텍스트다. 과거의 텍스트를 활용할 때는 시의성을 고려해야 하는데 아쉽다.
그 외 다른 챕터에서도 새로운 텍스트는 없다. 한병철의 피로사회, 투명사회, 리추얼의 종말, 사물의 소멸을 읽은 독자라면 읽을거리가 없는 신간이다. 사실 리뷰 할 이야기가 없지만 아쉬워서 몇자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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