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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 디디다

"한국은 종교갈등이 없는게 신기해" 질문에 박경리 선생이라면...

by didida 2019. 9. 11.

가끔 외국인에게 듣는 소리가 있다. "한국은 종교갈등이 없는게 신기해"

그렇네. 열성적인 개신교 인구도 많고 불교인구도 많고 천주교도 있고 토속 신상이라 할 수 있는 통일교 대순진리 등도 떵떵거리며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데 큰 갈등이 없다. 보통의 나라에서는 종교 갈등으로 인한 내전이 수차례 있었을 것이다. 그럼 이 평화?는 우리가 종교를 가볍게 믿는 탓인가? 아니다. 몇몇 종교는 가족과 생이별, 재산 몰수 등을 감내하고서야 입교가 가능해 진다. 이 현상에 대해 설득력있는 해설을 들은 바 없는데... 

 

소설 토지를 읽다 우연히 다음과 같은 문장과 마주했다.

 

 

박경리 [토지] 1부 4권 61p

서민들은 어떠했을까 한 마디로 이들은 모두 수구파다. 생리적으로 수구파다. 수만 동학이 개혁을 부르짖고 일어섰으나 시초부터 그들은 인륜 도덕을 강렬하게 내포한 집단이었으며 그들의 기치는 위국진충(爲國盡忠)이며 소파왜양(掃破倭洋)이었던 것이다. 하기는 햇볕 안 드는 뒷방에는 반계 유형원을 시조로하는 중인계급 일부가 있어 진실한 개화에의 꿈을 기르고 있었으나 이네들은 일본을 업고 재주를 부리는 정치적 무대도 능력도 없었으며 민주주의라는 낯선 장단에 춤을 추며 백성들을 모아보는 주변도 없었고 청나라가 일본에 패한 후 수구파들이 열어놓은 혈로 아라사에게도 줄이 닿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이네들은 조선의 토종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다시 이야기는 돌아가서 서민들, 이 백성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연 또는 무속의 세계인데, 유교에서 비롯된 삼강오륜의 도덕과 예의 숭상에서 온 관혼상제의 제도조차 무속의 빛깔을 띠었다. 하여도 무리한 얘기는 아닐 성 싶었다. 제반의 행사는 항상 무속을 동반했으며 최고 도덕의 효사사상은 조상으로 하여금 자연 종교에서의 제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였으니 신상의 대상이라면 그 어는 것도 거부하지 않는, 어떠한 종교이든 자라를 내어줄 것을 주저하지 않는 저 유교와 불교가 오랜 세월 아무 알력도 없이 공존해왔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목신이든 산신이든 지신인든 풍신이든 상사바위든 벽사의 처용화상이든 성황당에 모신 가면이든, 고사에 연유되거나 혹은 전설에 유래한 인물과 장소는 거의가 다 신앙의 대상으로서 정성을 들여왔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없었고 어느 하나만을 믿는 사람도 드물었다. 저 서학이 있기까지는 상호 연관되고 서로 얽혀서 그러면서도 불가사의하며 모호한 것을 맹신하는 마음에는 언제나 재앙에 대한 두려움, 천벌에 대한 무서운으로 가득 찬 소박하고 선량한 체념의 무리가 이 서민들이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들을 신비스런 자연 그 일부로 간주하고 영혼 깊은 곳은 무종교 무신앙의 자연 그 자체였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그들에게 종교적인 편견이 있을 수 없고 종교적 싸움의 유혈이 있을 수 없고 종교를 방어할 무기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신비주의자들의 일상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신령에 관한 행사는 대행자인 무격들에게 맡겨버리고 실행하는 것은 삼강오륜의 생활방식으로서 신비와 운명에 자신들 의지를 위탁하였으면서도 오로지 단 하나의 이성이며 실천과 노력을 도모하는 것이 유교적 인생관은 아니었었는지. 식자들뿐만 아니라 서민들이 즐겨 쓰는 도리(道理)라는 말이 있는데 자식된 도리, 부모된 도리, 사람의 도리, 형제의 도리, 친구의 도리, 백성의 도리, 이 도리야말로 생활의 규범이다. 천재를 제신의 노여움으로 감수하듯이 무자비한 수탈 속에서 가난도 이별도 견디어야만 하고 도리를 준연한 계율로 삼아온, 이 자각 없이 고행해온 무리가 조선의 백성이요 수구파의 넓은 들판이다. 조선 오백 년 동안 씨뿌려놓은 유교사상의 끈질긴 덩굴이며 무수한 열매인 것이다.

 

박경리 선생의 혜안에 감탄 할 따름이다.